2008년 07월 14일
과연 어느나라 정부인지 이게 뭐하는짓인지 모르겟네요. 네티즌 처벌 허허
오늘 오후에 일본에서 독도 영유권 명기 이야기로 다들 기분들 안좋으시죠?
근데 오늘 또하나 터트리셧네요.
아래 사진 일단 보시구요.

아래 사진 또보세요

# by | 2008/07/14 17:32 | 트랙백 | 덧글(0)


# by | 2008/07/14 17:32 | 트랙백 | 덧글(0)
치우(蚩尤)는 고대 한반도 동이족의 초기 국가인 배달(倍達) 청구국(靑丘國)의 14대 임금인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이었습니다. 배달 나라는 원래 백두산 아래의 길림(吉林) 지역을 영토로 하였는데, 청구국으로 불렸던 당시에 이곳에서 청동(靑銅)이 발명되면서, 검(劍)과 꺾창(戈)을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이 꺾창으로 만주에서 더 나아가 하북(河北)과 요서(遼西)를 차지하고 있던 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와 충돌하고 중원(中原)에서는 헌원(軒轅)과 충돌하여 전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전쟁과 더불어 배달 나라는 막을 내리고, 배달의 마지막 임금인 단웅(檀雄)과 웅씨왕녀(熊氏王女) 사이의 아들이 독립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운 것이 요동(遼東) 아사달(阿斯達)에 세워진 단군조선(檀君朝鮮)으로, 그가 바로 단군왕검(檀君王儉)입니다. 이 당시 치우가 중원에서 죽고, 그의 부하들이 산동(山東)에 머물면서 회대(淮岱)를 포함하여 구려(九黎)를 세웠으며, 구려의 백성들이 남쪽으로 이주하면서 양자강(揚子江) 유역의 호북(湖北) 지역으로 흩어지면서 남이족(南夷族)을 이루는데, 이들이 바로 초(楚), 오(吳), 월(越) 나라의 근간이 됩니다. (1) 그 후 산동에는 다시 낭야국(琅邪國), 번한(番韓, 番朝鮮)이 세워집니다. 그래서 옛부터 우리 선조들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초(楚)의 항우장사(項羽壯士)를 그렇게도 수없이 말했던 것이지요. 항우는 진시황(秦始皇)이 죽고 천하가 어지러운 가운데 유방(劉邦)이 나서자 스스로 자결하여 자신을 따라주었던 초의 백성들을 유방에게 맡기게 되며, 이리하여 유방은 한(漢, 孝)의 고조(高祖)가 됩니다.
고대부터 나라와 군대의 상징인 깃발에는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 현무(玄武) 등의 짐승을 그렸거나, 오로지 문자로 표시하였습니다. 한반도의 귀면(鬼面)과 중국의 귀면은 신석기시대 유물과 옥기(玉器)를 통하여 보면 모조리 멧돼지(豕, 亥)의 형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조형(祖形)이 두만강 유역에서 발견됩니다. 더구나 치우가 군주로 있었던 구려에서는 필강(疋絳)이라 하여 혜성(彗星)처럼 길게 뻗은 붉은 기운을 치우의 분신(分身)으로 여겼다고 하였는데, 그래서 치우의 깃발 모양이 굽어진 불꼬리가 달린 세모꼴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연(鳶)과 그 모양이 비슷하다는 말이지요. 깃발은 단군왕검이 승천하였을 때에도 내세웠다고 하는데, 이 때의 깃발이 아마도 장례 때에 사용하는 명정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장례시 영구(靈柩) 행렬 맨 앞에는 붉은색의 명정(銘旌)을 앞세우고, 그 뒤에는 노란색의 공포(功布)와 흰색의 만장(輓章) 깃발들을 들고 가게 됩니다. 조선시대 사용했던 군기(軍旗)에서도 세모꼴이나 네모꼴 천에 꼬리들이 달려있었으며, 그 안에 주로 신령시하는 영물이나 짐승, 또는 글자를 수놓았는데, 절대로 송곳니난 멧돼지 같은 귀면을 그리지 않았으며, 멧돼지를 그렸으니 당연히 뿔같은 것은 더구나 없었습니다. (1)
하상대(夏商代)의 도철문을 비롯한 사실적인 표현들은 대부분 무식한 인민(人民)들이 사람을 해치는 흉물을 제대로 알게끔 하여 기피하고 없애야 하는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고 기록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라의 상징으로 웅상(雄常)이 있는데, 이는 그저 나무로서 신목(神木)을 말한 것이며, 마을 입구에 세워놓은 장승(長生)에서 마을에 들어오는 마귀(魔鬼)를 퇴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얼굴을 무섭게 표현하였습니다. 그 밖에 한반도 전통의 무늬는 거의 대부분 문자에 가까운 추상적인 무늬이거나, 고대부터 내려오는 신령한 영물을 군왕이나 나라의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현재도 쓰고 있는 봉황 무늬는 단군 때부터 영물로 알려진 봉황을 소재로 한 것으로, 닭(鷄)에서 변형하여 암수로 구분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런데 한자의 상형문자는 치우 이후 은대(殷代)에 나오게 되니, 치우가 사용하였다는 깃발은 그저 붉은색의 세모꼴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추상적인 무늬로서 대표적인 것이 국기(國旗)에 나타나는 태극무늬(太極紋)이며, 이와 비슷하게 삼태극(三太極)이 있고, 삼원(三元, 三圓)이 있습니다. 또한 그 이전에는 환주십자문(環周十字文)의 윷무늬(柶板文)와 연꽃무늬(蓮花文)가 있었는데, 윷무늬는 동이족의 확산과 더불어 지중해 연안 지역과 독일, 아일랜드 등지의 유럽 전역에서 환주십자문(環周十字文)으로 되었고, 뒤이어 스위스, 영국 등지에서 십자문(十字文)으로 발전하여, 이 십자문이 고대부터 유럽 카톨릭 국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영국(英國)에서도 십자(+)와 간방의 X자를 합친 미자문(米字文)을 국기로 사용하는데, 십자문은 사방을 다스린다는 의미가 담겨있고, 간방의 X자문은 그 사이의 나머지 영토를 다스린다는 의미가 담겨져, 예로부터 유럽에서 간방의 무늬는 제후국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니 X자문을 상징으로 하는 스코트랜드는 십자문인 잉글랜드의 제후국이라고 나타낸 셈이지요. 십자문과 같은 성격이 독일 나찌의 스와스티카(Swastica) 무늬입니다. 결국 이들 모두 한반도 동이족의 십자형 윷무늬 이후에 나온 것으로, 영국에서 국기로 사용하는 푸른 바탕에 붉은 미자문은 한반도 동이족의 속국(屬國)을 상징한 것에 불과합니다.
또한 연꽃무늬는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한반도에서 사용한 무늬로 대체로 윷무늬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연꽃무늬와 윷무늬가 복합되어 일본 구주(九州)로 넘어갔는데, 그래서 구주의 왜국(倭國) 가운데 일부 제후(諸侯)는 십자(十字)에 간방(間方)을 더 그은 미자문(米字文)으로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일본에서는 이것을 미자문(米字文) 또는 국화문(菊花文)의 일종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국화문에는 미자문 가운데에 동그란 원이 있습니다. 이것을 좀더 변형하여 빨간 색으로 햇살이 뻗는 태양처럼 만든 것이 태평양전쟁 때에 사용한 일본의 일장기(日章旗)로서, 이 일장기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우리 한국민을 마구 죽일 때 사용한 총칼에 걸려져 있던 것입니다. 붉은 색의 일장기에 들어있는 미자문은 한국인들의 피로 물들여져 50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으며, 더구나 치우천왕과 관련된 깃발을 만들 때에 미자문을 넣는다는 것은 그렇게 피로서 나라를 지켰던 우리 조상들을 욕보이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2)
(2002-06-28 발표, 2004-08-06 수정)
# by | 2008/07/11 13:58 | 역사연구 | 트랙백(1) | 덧글(0)
이제까지 서양인들이 줄곳 주장해온 외계인은 몽땅 사기와 거짓입니다. 하다못해 중국 대륙에서도 어떤 비행접시가 나타나서 사람들을 납치해 갔다느니, 또는 대낮에 공중으로 납치당해 외계인들한테 이상한 수술을 받았느니, 또는 미국 모처에 외계인 시체가 있다느니 하는 소문과 근거 자료는 영국 정보기관에서 몽땅 거짓으로 조작한 것입니다.
서양인들이 외계인이라고 주장하는 특징은 고정되어 있습니다. 어린애 체격처럼 깡마른 작은 체격에 비하여 매우 커다란 머리통이 달려있으며, 잠자리눈처럼 크고 둥근 안구(眼球)가 튀어나왔고, 가슴에는 철갑이나 이상한 금속제 갑옷을 두르고 투구를 썼으며, 팔다리에도 군데군데 철갑으로 무장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하며, 알에서 태어나고 집은 반구형으로 이상한 광채가 빛나는 번들거리는 집에서 살고 있으며, 기기묘묘한 무기로 무장하였는데, 희안하게도 매우 온순한 성격을 갖고있으며, 기묘한 음악을 잘 다룬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모두 영국인에게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니까 영국인들의 조상들은 이러한 외계인들에 의하여 매우 커다란 문화적 충격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한반도의 역사는 매우 오래됩니다. 기록으로 전해지는 역사만해도 상당히 오래되었다는 말입니다. 한반도 최초의 나라는 환국(桓國), 그 다음이 배달(倍達) 또는 신시(神市), 청구국(靑丘國), 그 다음이 단군조선(檀君朝鮮)으로, 나중에 부여(夫餘)가 분리되면서 삼조선(三朝鮮)이라고 개칭하였지요. 이 당시에 단군조선은 주로 요동과 길림 등지의 만주 땅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남한은 단군조선의 영역이었지만, 만주와 북한에 비하여 늦게 개발되었습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과거부터 배달의 자손이라고 대대로 조상들로부터 들어왔습니다. 이 배달이 신시 청구국으로 말하는 배달(倍達) 나라입니다. 배달은 밝달, 박달, 부르달, 불땅으로 이어지면서 나중에는 푸른들(靑丘)과 통하게되는데, 이는 처음 청룡이라 하여 푸른 용암이 솟구쳐 나오면서 너른 들판이 형성되었기에 푸른 언덕이라 하여 이를 나라 이름으로 삼은 것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그러니까 누런 황토가 넘쳐나는 중국 중원에서 보면 동이족 땅은 푸른 언덕이어서 푸른 색을 동방을 뜻하는 색깔로 삼았고, 이래서 수천년간 아시아에서 동방을 뜻하는 색깔은 푸른색이 되었습니다. 즉 선사시대부터 가장 살기 좋은 땅이 한반도이었으며, 세상 누구나가 가고 싶어하는 천국(天國), 즉 '푸른들'에서 비롯된 말인 파라다이스(Paradise)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한반도에서는 구석기시대부터 신장에 비하여 얼굴이 유난히 큰 체형들이 발견되며, 또한 인류 최초로 화살과 활을 발명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신시시대에 백두산 아래 만주의 어느 곳에서 우연히 청동(靑銅)을 발명하게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남한의 돌검(磨製石劍)과 요동의 구리(銅)가 합쳐지면서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이 나오게 되었고, 곧이어 꺾창(戈)과 투겁창(矛) 등의 무기들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기록에서는 이 때 배달의 환웅(桓雄)인 치우(蚩尤)가 처음으로 구리와 쇠로 무기를 만들어, 현재 북경(北京) 서쪽의 탁록 들판까지 진출하여 중원 출신의 헌원(軒轅)과 전쟁을 벌였으며, 십년간 싸운 끝에 치우는 죽고 헌원은 황제(黃帝)가 되었다고 합니다. 치우의 죽음과 더불어 배달 나라는 끝나고 단군조선이 세워지게 됩니다. 이 때가 요순시대(堯舜時代)입니다. 이 당시 전쟁과 더불어 중원을 비롯한 중국에서도 처음으로 청동기를 만들게 되었고, 곧이어 주(周) 나라의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중국 최고의 청동기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치우가 헌원과 전쟁할 당시에 구리와 청동에 대하여 무지몽매하였던 중원의 화하족(華夏族)과 서이족(西夷族)은 치우가 전쟁을 벌일 때마다 짙은 안개가 끼고 천둥이 치고 번개가 내리쳤다고 하면서 두려움에 몸을 사렸지요. 그는 동두철액(銅頭鐵額)이라 하여 구리로 만든 투구를 쓰고, 철로 만든 가면을 썼으며, 군데군데 구리와 철로 장식을 한 갑옷으로 몸을 감싸고 전장에 나섰다고 합니다. 근대까지 일본의 장군(쇼군)들이 착용하였던 갑옷과 가면이 바로 치우가 썼다던 동두철액과 비슷할 것입니다. 일본은 고립된 섬인 만큼 천년넘게 똑같은 의례와 의식이 남아있는 경우가 흔합니다. 또한 한무제(漢武帝) 이전까지 중국은 동이족의 전통과 예를 그대로 받아들여 나라의 제도로 삼았는데, 그러한 사례가 주례(周禮)에 남아있습니다. 이 주례에 소개되는 방상시(方相氏)는 무덤에 들어오는 악귀를 물리치는 한반도의 토지신으로, 네 개의 황금눈을 달게 되어있는데, 이는 곧 단군(檀君)을 검(劍)과 견주어 의인화한 것으로, 석상과 장승을 통하여 보면 아마도 구리로 만든 퉁방울같은 모양의 눈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이런 청동기시대에 부여, 거창 등지의 남한(南韓) 지역을 비롯하여 요서(遼西), 길림(吉林) 지역에서는 아주 특이한 모양의 집을 만들었습니다. 반구형(半球形)으로 봉토분처럼 집을 만들었는데, 겉면에는 진흙을 두툼하게 바르고, 표면을 연마하여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도록 하고, 출입구는 꼭대기 중앙에 만들어 사다리를 타고 드나들었습니다. 집을 수풀 속에 만들면 그 모양이 마치 커다란 알이 보금자리에 들어있는 모양처럼 보이게 됩니다. 또한 집안에서 불을 피우면 그 연기와 빛이 하늘까지 직선으로 뻗어 올라가 불을 처음 본 미개인이라면 마치 하늘과 반구형 집이 빛으로 이어진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이리하여 이들의 신앙은 한결같이 하늘에서 내려온 인물이 알(卵)에서 태어난다는 난생설화(卵生說話)입니다. 그런데 이 알 모양의 반구형 집은 한반도 특유의 서로 다른 재료의 결합방식에서 창안된 구조로서, 남한에서 비롯하여 점차 북쪽으로 확산되어 나중에는 북극 지방 에스키모의 '이글루'라는 반구형 눈집으로 남게 되었고, 이것이 북미대륙으로 건너가면서 인디언 특유의 지붕출입구가 나오게 됩니다.
얼굴에는 동두철액을 뒤집어 쓰고, 검, 꺾창, 투겁창 등의 기묘한 무기를 들고 있는데, 막상 그 사람은 허여멀건 피부의 사람 모양으로, 그 생김새가 자그마한 키에 머리통은 크며, 가끔 퉁방울 같은 금속제 눈을 달고 있다. 살고있는 집은 둥그런 알 모양처럼 생겼는데, 어디로 들어가는지 갑자기 없어졌다 갑자기 나타나고, 수시로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집으로 이어져 있다. 또한 이들에게 몽둥이나 돌로 내리쳐도 꿈쩍 안하면서도 이들이 순간적으로 이상한 무기를 휘두르면 사람들이 피를 흘리면서 마구 쓰러져 버린다. 그리고 어딘가 데리고 들어가면 그 집안은 괴이한 모양의 장식으로 가득 차 있는데, 막상 상대해보면 온순한 성격으로, 자신들 이상으로 뛰어난 머리에 많은 지식과 통찰력으로 가득 차 있는 매우 이상한 모양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들 종족의 군장인 위대한 신의 이름은 알(Al), 아라(Ara), 또는 아리(Ari), 알라(Ala), 알리(Ali), 알루(Alu)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러니까 한반도에서 청동기시대가 시작되었을 때에 정복과 전쟁 등의 이유로 유럽으로 건너간 한국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처음으로 대하는 무지몽매하였던 유럽의 선사인들은 이들을 아리안(Arian) 또는 알리언(Alien)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이 말은 곧 그 전대(前代)에 들어온 고인돌 문화와 더불어 외지에서 들어온 매우 뛰어난 문화의 소유자들을 일컫는 말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까지 영국인들이 주축이 되어 우주 바깥의 외계에서 들어온 외계인이 지구를 건설했다는 이야기는 그저 헛된 망상과 거짓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이와 관련된 모든 소문과 증거자료는 전부 조작된 것입니다.(1)
(2002-05-27 발표, 2004-08-06 수정 )
# by | 2008/07/11 13:55 | 역사연구 | 트랙백 | 덧글(0)
이이제이(以夷制夷), 즉 오랑캐는 오랑캐로서 제압한다, 라는 글귀는 수천년 넘게 이 지구상 전역에서 적용되어 그 효험을 확실하게 인정받은 글귀이다. 그러니까 최소한 이천년이 훨씬 넘게 동아시아, 아니 그로부터 확산되어 지구상 전 세계에서 역사가 쓰여진 이래, 아시아와 유럽 대륙 동서남북 전 세계 어디에서나 빠짐없이 통용된 전쟁과 분규 해결의 원칙으로서, 손자병법(孫子兵法)의 근본을 이루게 한 병법(兵法) 중의 하나이다. 곧 어느 다루기 힘든 종족을 다루고자 할 때에는 그와 비슷한 종족의 힘을 키워서 서로 싸우게 하고, 그 때의 혼란한 틈을 타서 그 양쪽을 공격하여 한꺼번에 양쪽을 제압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이(夷)가 곧 동이(東夷)로서, 동이는 예(濊, 穢)로부터 산동(山東), 요서(遼西), 요동(遼東), 길림(吉林), 북한(北韓), 남한(南韓), 구주(九州)를 함께 포함(包含)하여 말하는 것으로서, '오랑캐 이(夷)'는 곧 전 세계 인류 문화의 최초(最初), 최고(最古)의 기원지(起源地)를 뜻하는 말이다. 비록 조선시대(朝鮮時代)를 창출(創出)한 태조(太祖) 이성계는 신설한 자신의 왕권을 돈독하게 하기 위하여 스스로 한반도의 조선족(朝鮮族)을 중국 중원(中原)의 화하족(華夏族) 보다 낮은 지위로 낮추면서, 북방(北方, 北夷) 고유의 인(仁) 중심의 불교(佛敎)를 옛 나라인 고구려(高句麗, 北方)와 신라(新羅, 南方)에서 파생된 이차적(二次的) 종교(宗敎)로 격하시키고, 그 대신에 공자(孔子)에게서 확립된 예(禮) 중심의 유교(儒敎)를 일차적(一次的) 종교로 우선하게 되었다. 공자는 주(周, 東周) 나라 춘추시대(春秋時代)에 활동한 산동(山東) 출신으로, 춘추 이전에 산동은 삼조선(三朝鮮)에 속하였다.
유교(儒敎)는 단군(檀君) 치우천왕(蚩尤天王) 이래,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접어들면서, 삼조선(三朝鮮)을 비롯한 아시아 전역의 개별적인 군소정당(群小政黨)들이 날카로운 날의 청동기를 획득하면서, 함부로 인명(人命)을 살상하고, 흉기(凶器)가 인륜(人倫)을 앞서게 되자, 이에 반대하여 나오게 된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 사상(思想)이다.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이(夷)는 동방(東方)에 사는 사람들을 뜻한다. 많은 사람들이 활(弓)을 들고 다니고, 큰 사람(大人)들이 많다. 또한 옛 글자의 인(仁)과 같은 뜻이다. 이(夷)들은 어질어서 오래 사는데, 군자(君子)들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있는 나라이다." 라고 하였다. 즉 이(夷)는 활을 사용하는 큰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이제까지 이씨(李氏) 조선시대에 통하였던 오랑캐와는 사뭇 다른 뜻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어찌해서 이(夷)가 오랑캐라는 뜻으로 해석되었는지, 또한 오랑캐가 진정 무슨 뜻인지도 현재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채로 그저 옛부터 그렇게 해석되어 온 것인데, 하다못해 동서고금을 통하여 가장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이야기들이 기록되어있는 산해경(山海經)에서도 이(夷)와 조선(朝鮮)이라는 말은 있지만, 오랑캐나 또는 그와 비슷한 말 조차 없다. 보통 사이족은 '오랑캐 이(夷)', '오랑캐 만(蠻)', '되 융(戎)', '오랑캐 적(狄)'이라 하여, 우리 스스로 오랑캐라는 뜻으로 이만융적을 해석하고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특히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을 '되'라고 부르고, 나중에는 중국의 한족(漢族)을 포함하여 '되' 또는 '떼'라고 통칭하여서, 오랑캐란 말은 주로 한반도 고대 종족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오랑캐란 말을 혹자는 개와 사람이 섞여진 반인반수(半人半獸)로서 오낭구(五囊狗) 또는 여진족(女眞族)의 일파인 올량합(兀良哈)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하는데, 이는 일부 소수 종족을 일컫는 말이어서, 사이족(四夷族)을 뜻하는 오랑캐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단지 중국 섬서(陝西) 지방의 서이(西夷)는 동이(東夷)의 환웅(桓雄)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반고(盤固, 盤瓠)의 후손으로, 이들을 견융(犬戎, 西戎)이라 하여 '견자(犬子)'라고 별칭으로 부르면서 개(犬)와의 관련을 말하고 있는데, 이들을 한반도에서는 오랑캐라 하지 않고 '되'라고 불렀다. 그런데 나중에 '되'라고 불렸던 북방의 여진족(女眞族)은 숙신(肅愼)에서 출발하여 흑수(黑水)로 갈라진 종족으로, 여진의 김씨(金氏)는 고구려의 후예가 되는데, 북구에서는 이들을 오로진(Orogin, 알金)이라고 불렀으며, 이들이 철광원석을 뜻하는 금속(金屬, Ore)을 발명하여 북구에 영향을 준 종족이라고 할 수 있다.(1) 그래서 고려와 조선시대에 북방 여진족을 멸시한 것이 아니라, 될 수 있는 한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화친하여 좋은 사이를 유지하려 했었다.
징기스칸의 몽고 제국에서는 한반도 종족을 일컬어 색륜족(索倫族)을 뜻하는 '소롱고'라고 불러왔는데, '소롱고'와 '오랑캐'의 발음이 비슷하여, 오랑캐는 곧 소롱고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소롱고는 '시라(尸羅)'와 통하여 '신라(新羅)'로 이어지고 있다. 더구나 고구려(高句麗)의 전신(前身)인 탁리국(탁離國)은 곧 색리국(索離國)이자 고리국(고離國)으로서, 기록마다 약간씩 달리 쓰여졌는데, '탁', '색', '고'자는 지상에 높게 세운 나무덧널(木槨)과 고인돌(支石墓)에서 비롯한 글자로서, 고대 한글에서 '돌'과 '석(石)'의 발음이 뒤섞여 혼용되면서 분리되어 나온 것과 같은 차원으로 여길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터키족(Turkey)은 돌궐(突厥), '튜르기', '투르캐(Turkiye)'라고 하여 색륜족, 색족, 스키타이족, 색슨족과 같은 어원을 이루는데, 자식(子息) 또는 색(索)에서 비롯하여 러시아와 북구의 이름에서 사람을 뜻하는 말인 '새끼', '시키', '스키(ski)'가 되었듯이, 오랑캐의 '캐'는 기(旗)와 마찬가지 의미로 쓰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옛말에 '어린아해'라 해서 아이를 '아해'라고 하였듯이, 결국 '캐'는 대인(大人)에 상대되는 어린 사람이나 그 종족을 일컫는 말로 볼 수 있으며, '오랑'은 아라, 아랑, 알량과 같은 어원으로 볼 수 있어, 오랑캐는 '아리아해' 또는 '아리아기', 즉 '알(卵)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사이족의 북쪽 지역은 주로 천손설화, 남쪽 지역은 주로 난생설화가 전해지는데, 유난하게도 만주 지역은 천손설화에 뒤이어 난생설화가 나오면서 서로 겹치고 있다. 결국 이씨(李氏) 조선시대에 통하였던 '오랑캐 이(夷)'는 개(犬)하고는 전혀 상관없으며, 난생설화를 통하여 등장한 '아리아해', 또는 '아랑기' 정도에서 그 어원을 짐작할 수 있으며, 따라서 오랑캐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난생설화의 집단을 일컫는 말로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아리랑과 서리랑은 큰 알과 작은 알을 뜻하는 한글 고어이며, 김수로왕은 작고 귀중한 쌀알(살)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어, 아리랑은 오랑캐와 상통하고 있다.(2)
그런데 이(夷)자도 처음에는 '주검 시(尸)'자에서 비롯한 것으로, 이것도 오랑캐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로 부터 한반도에서는 죽은 사람이 산 사람보다 더 대접받는다고 하였다. 즉 주검을 매우 중요시하였다는 말로서, 이와 관계되어 '오랑캐 이'자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은대(殷代)의 갑골문(甲骨文) 상형(象形)에서 '시(尸)'자는 무릎을 앞으로 모아 구부려 앉은 사람 모습으로, '주검 시(尸)'자가 '활 궁(弓)'자와 서로 통하여, '주검 시(尸)'자가 곧 '활 궁(弓)'자가 되는데, 주대(周代) 이후에 '시(尸)'자는 '주검 시(屍)'와 '동쪽 사람 이(大 + 尸)'로 구분되고, 인(人), 인(仁) 자가 함께 사용되다가, 후한대(後漢代)에 이르러 시(尸)는 완전히 주검(屍)의 뜻이 되었고, 그 대신에 이(夷; 大 + 弓)자가 등장하였다. 그러니까 이(夷)자는 후한(後漢) 이후에 나온 글자로서, 보통 '활 궁(弓)'자에 '큰 사람 대(大)'자가 복합되어 '활을 든 동쪽의 큰 사람들'을 뜻하게 되었는데, 즉 이 당시에 한반도 종족은 키가 크고, 얼굴이 큰 종족이란 점을 알 수 있다. 그와는 반대로 중원에는 작다는 뜻이 포함된 초(楚, 草)와 민(민, 民)이 사용되었고, 일본에서도 작다는 뜻이 포함된 왜(倭)자가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문자로 살펴보면 이(夷)는 키가 큰 종족으로, 처음에는 무릎을 굽힌 모양으로 대표되다가, 나중에는 활(弓)로 대표되었는데, 고대의 아시아에서 유독 한반도에서만 돌활촉(石鏃)과 돌칼(石刀), 돌검(磨製石劍)이 가장 많이 출토되고 있다. 이래서 상고시대의 한반도는 활(弓)과 검(劍), 칼(刀)을 발명한 곳이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夷)는 '활을 든 큰 사람들'에서 더 나아가 '도구를 사용하는 동쪽 사람들'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이(夷)들은 수시로 이주하면서 점차 중국 각지에 흩어져 살았는데, 그 들 사이로 널다란 중원이 새롭게 형성되자, 사이(四夷)들은 옛 영토에서 그 중심의 중원으로 모여들었고, 그러면서 하(夏), 은(殷, 商), 주(周) 나라가 세워지게 되었는데, 주대(周代)에 이르러 중원의 화하족(華夏族)과 사이족(四夷族)이 중원 각 지역에서 다투기 시작한다. 이 때가 주(周) 나라의 춘추시대(春秋時代)와 전국시대(戰國時代)로서, 이 난국(亂局)을 주왕(周王)은 봉건정책(封建政策)으로 무마하였는데, 사이족 출신과 그 후손들이 주왕(周王)의 책봉(冊封)을 받아, 각 지역의 제후(諸侯)와 귀족(貴族)으로 활약하면서, 구이족(九夷族)을 이루게 되었다. 이 당시 요동(遼東)과 대동강(大洞江) 유역의 조선(朝鮮, 古朝鮮), 장강(長江) 이남의 초(楚), 요서(遼西)의 연(燕), 산서(山西)의 진(晉)과 섬서(陝西)의 진(秦) 지역들이 사이(四夷)의 옛 영토로서, 여기에 산동(山東) 남부의 낭야(瑯邪, 琅邪, 琅耶, 齊)를 포함하면 '천하(天下)'가 된다.
그러니까 진시황이 중원을 차지하면서 사방의 사이족이 세운 여섯나라(六國)를 병합하려 하자, 이에 대항하여 사이족 오랑캐들이 합종연횡(合縱連衡)을 주창하여 진시황에게 대항하였는데, 진시황의 책사(策士)인 이사(李斯)가 사이족의 미묘한 역학관계(力學關係)를 이용하여 적은 힘으로 이들 모두를 통합할 때에 나온 말이 이이제이(以夷制夷)이다. 이 글귀는 그후 이천년 넘도록 수많은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지다가 19세기에 들어서 영국인들이 주도가 되어 중국을 침략하면서, 오히려 서양인들에게 알려지고, 이에 덩달아 조선, 중국, 일본이 서로 싸우게 되면서 이 글귀가 수시로 적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글귀로 인하여 가장 처참하게 피해를 당한 곳이 동이족의 근거지인 우리 한반도로서, 같은 피를 나눈 동족(同族)이 세 군데로 갈라져 지금까지 50년 넘게 남한(南韓)과 북한(北韓), 그리고 요동(遼東)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청(淸) 나라 때에 요동(遼東)은 청(淸)의 조상 땅이라 하여 조선족(朝鮮族) 주민들을 완전히 소개하고 이주시켜 대부분 공지(空地)로 되었으며, 청 말기에 영국의 꼬임으로 일본군이 들어가 만주국(滿洲國)을 세우려 하면서 한족(漢族)들이 들어가 살게 되었고, 그리하여 현재처럼 중국의 땅이 되었다. 즉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말을 가장 잘 활용한 사람들이 영국(英國)이 주도가 된 서양인과 일본인들로서, 한반도에서는 아직도 우리 스스로 이 글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2002-04-26 발표, 2002-07-24 수정보완, 2003-05-07 주석보충)
# by | 2008/07/11 13:53 | 역사연구 | 트랙백 | 덧글(0)
기원 후 한반도의 고대 역사는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의 삼국시대(三國時代)로 통칭하고 있으며, 그에 덧붙여 나중에 신라에 의하여 복속된 가야(伽倻)의 여러 소국들을 포함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한반도에서 기록과 유물을 통하여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는 고대 국가로서, 우선 고구려, 백제, 신라를 꼽고 있으며, 이들 삼국은 각자 지도부가 서로 달라 다른 나라로 확실하게 분리되어 있었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기원전의 삼국시대 이전의 시대는 고조선(古朝鮮) 또는 단군조선(檀君朝鮮)으로 두리뭉실하게 얼버무리며 통칭하고 있는 형편이다. (1) 그러나 동이(東夷)의 환단고기(桓檀古記)를 비롯하여 중국(中國)의 사서(史書)에서는 이 시대에 한반도와 요동에서 매우 독특한 국가 체제가 성립되어 있었다는 점을 간간이 언급을 하고 있다.
즉, 삼국시대 이전에는 삼한(三韓)이 통치하는 삼조선(三朝鮮)이 있었는데, 이 삼조선은 진조선(辰朝鮮), 번조선(番朝鮮), 막조선(幕朝鮮)으로서, 이들 세 나라를 각각 진한(辰韓), 번한(番韓), 막한(幕韓)이라고 불리는 3명의 단군임금(檀君王儉)과 여러 군장(君長)들이 통치하였으며, 환웅(桓雄)이 이들 여러 임금들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왕검(王儉)은 '임금'이라는 한글의 음역(音譯)으로서, 단군왕검(檀君王儉)은 땅(地, 檀, 達)을 다스리는 군주이며, 환웅(桓雄)은 하늘(天, 桓, 韓)을 다스리는 군주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들 삼한(三韓)은 각각 처음부터 발해(渤海)로 불려졌던 황해(黃海)의 연안에 영토를 두었는데, 번조선은 연(燕) 나라의 땅이었던 현재의 북경(北京) 근처의 하북성(河北省) 일대와 요서(遼西) 지역, 진조선은 요동(遼東)과 만주(滿洲) 일대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막조선은 그 위치가 분명하지 않으나 아마도 과거의 마한(馬韓) 지역인 현재의 남한지역이었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그러다가 지구대격변(地球大激變)과 함께 9년간의 대홍수(大洪水)가 일어나면서, 중국(中國)의 중원(中原) 지역이 모조리 바닷물에 잠기게 되었다. 그 이후에 물이 빠지면서 황하의 물줄기가 바뀌면서 중원 지역이 새로 만들어지고, 해마다 황하의 물줄기가 바꿔지게 되면서, 현재처럼 황하 하류 지역에는 황토(黃土)가 수십미터 높이로 쌓이면서 광활한 중원이 형성되었다. 이 때 가서야 중국의 중원에서는 가까스로 나라라는 것이 성립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우왕(禹王)이 세운 하(夏) 나라로서, 이 당시 요동과 한반도는 삼조선(三朝鮮) 이전의 전기 고조선(古朝鮮) 시대에 해당한다. 우(禹)는 동이족 출신인 순(舜) 임금의 신하이었는데, 현재의 상해(上海) 부근의 도산(塗山), 즉 홍수로 인하여 진흙탕으로 뒤덮인 회계산(會稽山)에서 단제(檀帝, 天帝)가 보낸 태자(太子) 부루(扶婁)를 만나 회합(會合)하였고, 부루를 통하여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원리가 적혀진 황제중경(黃帝中經)이란 책을 얻어가, 전에 쌓았던 적석산(積石山) 제방이 다시 무너지자, 황하의 물길을 그대로 놔두면서, 자연적으로 황하의 치수(治水)에 성공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우(禹)는 치수의 공(功)을 단제(檀帝, 天帝)에게 인정받아 하(夏)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이 하(夏) 나라가 중원이라는 신대륙에 들어와 처음으로 세워진 나라로서, 하(夏) 나라의 종족을 화하족(華夏族)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화하족이 중국 본연의 한족(漢族)의 기반을 이룬다.
요(堯)는 도당(陶唐) 나라의 임금이었고, 순(舜)은 유우(有虞) 나라의 임금이었으며, 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의 신농국(神農國), 그리고 상(商) 나라와 함께 현재의 태행산(太行山)에서 북경 북쪽의 연산(燕山) 일대, 그리고 산동(山東) 지역에 흩어져 있었는데, 대홍수 이후에 이 모든 나라들이 충돌하면서 수시로 변화가 매우 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요서 북방과 요동 지역, 그리고 한반도에서는 홍수의 영향을 그다지 받지 않은 관계로 나라가 안정되어 있어, 대홍수 이후에 새로 넓혀진 황해(黃海) 연안 지역을 진번조선이 우선적으로 차지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황하의 물줄기가 산동 북쪽으로 바뀌면서 산동(山東) 남쪽의 연안(沿岸) 지역도 진번조선(眞番朝鮮)에서 차지하게 되었고, 중원의 구주(九州)를 감독할 낭야국(琅邪國, 現 大汶口 근처)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2) 나중에 다시 옛부터 동이족(東夷族)이 건너가 곳곳에 거주하였던 발해 연안 지역을 고구려(高句麗)에서 다시 한번 차지하게 되었으며, 남이족(南夷族)이 거주하였던 오월(吳越) 지역도 나중에 다시 점유(占有)하여 고구려(高句麗)의 영토로 삼게 된다. 이 때 오월(吳越) 지역은 백제군(百濟軍)의 힘으로 평정되었는데, 백제는 고구려의 아우(弟)가 되는 나라로서, 군 병력을 형(兄)에게 빌려준 셈이었다. 이런 점에서도 고구려와 백제는 같은 나라에 속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나중에는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서도 나타난다. 삼묘족(三苗族)은 원래 북방의 동이족에서 분리된 동이의 일파로서, 주로 남해(南海)와 장강(長江, 揚子江) 하류 일대에서 남이(南夷)를 형성하다가 나중에 황해(黃海) 연안(沿岸)과 중원(中原) 지역으로 확산되어 화하족(華夏族)과 더불어 한족(漢族)의 기반을 이루게 된다.
어쨌든 하(夏) 나라의 우왕(禹王) 이전에는 이 산동의 서쪽 지역을 헌원(軒轅)이 차지하면서 치우(蚩尤)와 대립하여 전쟁을 여러 차례 치렀는데, 치우가 사고(事故)로 죽으면서, 황하 하류 지역을 헌원(軒轅)이 차지하여, 그후부터 황제(黃帝)로 불려지게 되었고, 이때 중원에서는 동이족을 이겼다는 기념으로 응룡(應龍, 黃龍)을 만들어 축제를 하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폭죽(爆竹)이 발명되면서 이천년을 넘게 중원(中原) 한족(漢族)의 전통을 이루게 된다. 이 때 치우는 배달(倍達)의 군장인 환웅(桓雄)으로서, 처음으로 구리와 철을 캐내어 병기(兵器)를 만들었다고 하였으며, 그의 휘하에 요서(遼西)에는 대요(大撓)와 산동(山東)에는 창힐(倉힐)을 두었다고 하였는데, 나중에 치우가 죽으면서 창힐은 헌원의 휘하에 들어가 창힐은 중원에서 글자(契, 書)의 창시자(創始者)로 대접받게 된다.
하후씨(夏后氏, 夏) 나라 이후에는, 서쪽의 상(商)과 동쪽의 은(殷) 나라를 거쳐, 주(周) 나라 말기(末期)에 이르러 이족(夷族) 출신인 정(政)이 옛 영토에서 동쪽으로 진출하여 주(周, 西周) 나라를 동쪽으로 몰아내고 진(秦) 나라를 세우게 되었는데, 대홍수 이후에 다시한번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라는 혼란기를 틈타 중원이라는 신대륙(新大陸)에서 새로이 형성된 중원 지역의 6개국을 모조리 병합하면서 중국 최초로 통일국가를 이루게 된다. 그후에 다시 발해(渤海)와 황해(黃海) 연안의 동이족(東夷族)들을 모조리 병합하게 되었는데, 이때를 전후하여 발해와 황해 연안에 거주하였던 단군 휘하의 동이족의 여러 귀족들이 수하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한강(漢江, 漢水) 이남의 남한(南韓)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으며, 길림(吉林) 지역의 부여(夫餘)에서도 남한의 마한(馬韓) 땅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과거의 진조선과 번조선의 왕족과 귀족들이 남해안으로 이주하여 각각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을 세우게 되어, 다시 한반도에서 삼국(三國)이라는 삼위일체(三位一體) 방식의 통일(統一) 체제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고구려와 백제, 신라는 각기 다른 나라로 알고있지만, 실상은 통일된 조선(朝鮮)이라는 한 나라에서 연방국(聯邦國)의 주(州)처럼 정치적으로 지역적으로 구분되어 유지되었는데, 이 구분을 중국의 사가(史家)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여 오늘날까지 혼란을 가중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요동과 한반도에 산재한 고인돌의 분포를 보면, 전기(前期)의 양식(樣式)은 황해도(黃海道), 요동(遼東), 길림(吉林)의 세 지역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고, 후기(後期)의 양식은 요동(遼東), 북한(北韓), 남한(南韓)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형식상 후기에 산동지역이 포함되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이 산동 지역이 포함되면서 동이족이 중원의 화하족과 충돌하게 된 것으로 여길 수 있다. 그래서 중원에서 희귀하게 발견되는 돌무덤은 오로지 돌널무덤(石棺墓)이거나 후기(後期)의 돌방무덤(石室墓)이며, 이와 더불어 봉토분(封土墳)이 나타나는데, 이들 대부분 동이족의 흔적을 보이고 있으며, 진시황(秦始皇) 이후에 가서야 중원에서는 돌방무덤(石室墓)의 양식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원래 중원의 무덤 양식은 황토를 깊숙하게 파고 들어가거나, 굴을 'ㄴ'자 형으로 파고 들어가 주검을 매장하였으며, 아니면 애초부터 주검을 그대로 버렸는데, 산동(山東) 남부 지역의 이층대(二層臺) 무덤 양식은 분명 한반도 남부의 이단토광묘(二段土壙墓)에서 그 규모가 커졌다고 할 수 있으며, 은허(殷墟)의 무덤도 이와 관련되어 나온 무덤 양식이다.
이렇듯이 중원의 화하족(華夏族)은 원래 매장(埋葬)에 관심이 없는 종족이었는데, 동이족의 영향을 받으면서 중원에서 조상숭배(祖上崇拜)와 제사(祭祀), 그리고 매장(埋葬)의 관습이 형성되었으며, 한반도의 동이족처럼 삼신사상(三神思想)이 깃들여졌다. 그래서 동이의 한반도에서는 전통적으로 3이라는 숫자를 좋아하고, 그 대신 중원에서는 진(秦) 나라 이후에 사방의 사이족(四夷族)을 제압하면서 사방관념(四方觀念)이 형성되어 중원에서는 4라는 숫자를 즐겨 이용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001-10-02 발표, 2003-03-14 수정, 2004-08-06 주석보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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